조선왕조의 인조반정

2022. 6. 3. 20:57역사를 알아야한다.

조선왕조의 인조반정

조선왕조의 네 번째 반정인 인조반정으로[4] 백부 광해군과 지지세력인 북인(대북파) 일파를 축출하여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의 5남인 정원군이며, 어머니는 연주군부인 구씨다. 선조는 또 다른 후궁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고, 늦게 맞이한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낳았다. 따라서 임해군, 광해군, 영창대군은 인조의 삼촌, 정명공주는 인조의 고모가 된다.[5]

정원군과 연주군부인 구씨의 장남[6]으로 태어나 능양군[7]으로 책봉되었다. 원래 인조는 왕위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나, 인조반정이라는 상당수의 실무자와 중립세력들이 협력한 쿠데타(반정) 과정을 통해서 왕위에 추대되어 오른다.

왕비는 두 명으로, 능양군

왕비는 두 명으로, 능양군(綾陽君)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인열왕후(仁烈王后)와, 그녀가 1635년 늦둥이를 낳다가 산욕으로 사망하고 3년 후인 1638년에 계비에 간택된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장렬왕후는 인조가 사망한 뒤에 대비로서 자의대비(慈懿大妃)로 불렸는데, 간택 당시 나이가 겨우 14세(1624년생)로, 명목상 자식인 효종(1619년생)보다도 5살 더 어렸다. 효종이 사망한 뒤 그녀의 입장을 두고 조선에서 그 유명한 정치 격론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예송논쟁이라고 한다.

반정을 통한 인조(仁祖)의 집권은 실질적인 조선 제2왕조의 창건으로 평가된다. 조선후기 300년 간 진행된 제도개혁의 논의는 인조 시대에 시작되었으며, 왕통상으로도 인조 이후 즉위한 조선의 임금은 마지막 군주인 순종[8]까지 모두 인조의 직계후손들이다. 혈통상으로 고종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직 후손이다.[9]

처음으로 청에서 시호를 받은 임금이지만 조선 조정은 조선전기와 마찬가지로 중국 왕조에서 내린 시호를 받기만 하고 실제로는 중국과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10]​ 

묘호는 시법에서 덕을 지켜 업을 높였음을 일컫는 '열(烈)'에다가 나라에 큰 공이 있는 군주라는 이유에서 조(祖)를 붙여 열조(烈祖)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나,

마지막 걸림돌은

마지막 걸림돌은, 이미 인종(仁宗)이란 묘호가 있으므로 또다시 '인(仁)'자를 묘호로 올리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미 예종임금 때 묘호를 정하면서 세종이 있음에도 세조를 붙여준 선례가 있었고, 명나라에도 인종과 인조를 같이 쓰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기에 묘호가 그대로 인조로 확정됐다.

"열조"는 시법(詩法)에서 모두 3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신하들이 해석한 것은 "덕(德)을 지켜 업(業)을 높였다"이다. 실록에선 한 소열황제의 사례를 봤을 때 열조란 묘호가 인조의 공덕(恭德)에 부합된다고 적었다.[13]

시법에서 인(仁)은 성리학에서 추앙하는 최고/최상의 덕으로, "인조"라는 묘호는 성군 중의 성군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매우 명예로운 묘호였다. 예를 들어 성종 사후 인종(仁宗)과 성종(成宗) 중 뭘 묘호로 정할 지 논쟁할 때, "제왕의 묘호는 '仁'만 한 것이 없으니 '成'이라는 글자로는 대행 대왕의 지극하신 덕을 다 표현할 수 없다.[14]"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15] 이후 사대부들에게 세종(조선)에 버금가는 성군으로 받들어질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仁宗이 되지 못했다.[16]

시법을 근거로 조

그리고 조(祖)는 보통 재조[17]의 공과 같이 큰 공을 세운 임금에게 올리는 영예로운 묘호이다. 관례적으로 조(祖)는 왕가를 연 시조와 중시조로 대우받는 왕에게 올리는 묘호이며 종은 공덕과 무관하게 왕가라는 종가를 계승한 왕들에게 일괄적으로 쓰였다. 시법을 근거로 조(祖)와 종(宗)은 공이냐 덕이냐의 차이이지 어느 쪽이 좋고 나쁜 것은 아니라고도 하지만, 왕이기만 하면 받을 수 있는 종에 비해 더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한 조를 더 높게 쳤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결격사유가 있는 부왕을 둔 후계자들이, 취약한 정통성과 도전받는 왕권을 포장하기 위해 거꾸로 아버지에게 '조'를 바치는 추숭사업을 강행했다. 왕이 된 조카에게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의 아들 예종은 아버지에게 '세조'를, 임란 내내 추태를 보여 왕가의 권위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하성군의 아들 광해군은 제 아버지에게 '선조'를, 정치암투에만 능하고 내정과 외교를 모두 말아먹은 희대의 암군 능양군의 아들 효종은 제 아버지에게 '인조'를 묘호로 선사하며 귀한 묘호를 남발한다. 강화 출신으로 정통성이 약했던 철종 역시 홍경래의 난과 세도정치로 얼룩진 치세를 보낸 양아버지 순종을 '순조'로 추숭하였다. [18] 이러한 세조나 선조와 인조가 과연 세조의 전례를 들어 다른 왕들을 제치고 왕가의 시조 대우를 받을 자격과 업적을 가진 왕들인가를 생각해 보면...

즉, 인조(仁祖)라는 묘호는 정말 글자 뜻으로만 보면 성군이자 명군에, 거의 요순급의 이상적인 초월 군주에게나 주어질 법한, 조선사뿐만 아니라 5,000년 한국사를 통틀어 현종이나 세종 정도만이 어울릴 만한 그 정도의 묘호라는 얘기다.즉, 암군은 절대로 쓸 수 없는 그런 수준의 영예로운 묘호다.[19]

황해도의 해주목

1595년, 황해도의 해주목에 있었던 해주행궁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정원군 내외가 해주로 피난을 가 있을 때 연주군부인 구씨가 그곳에서 능양군인 인조를 출산한다. 실록에 실린 인조행장을 보면, 한 고조 유방처럼 넓적다리에 무수한 사마귀가 있어서 할아버지 선조가 이걸 보고 "한 고조랑 같은 상이니 누설해서는 안 된다"라고 정원군에게 당부했다고 하는데, 출처가 '행장'인 만큼 왕을 돋보이기 위한 덧붙힌 기록으로 보는 게 적합하다. 선조는 인조의 휘와 자를 직접 지어주며 총애했고, 광해군은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역시 행장(行葬) 특유의 과장으로 보인다.

선조 때 능양군(綾陽君)으로 봉해졌다. 정치감각이 빼어났던 할머니 인빈 김씨가 광해군이 세자에 책봉된 후 입장을 바꿔 자신의 조카딸을 후궁으로 들여보내고, 여러모로 도와주었기 때문에, 광해군 초기때까지는 대우가 좋았다. 그의 아버지 정원군은 왕실 종친의 어른으로서 광해군이 옥사를 일으킬 때 관제데모를 주도하는 역할 정도만 하면서 유유자적 지냈다. 하지만 살벌한 공안정국은 이들 가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재위 중반으로 갈수록 의심병이 심각해진 광해군은 역모 고변만 있으면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옥사를 일으키고 혈육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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