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1. 08:33ㆍ역사를 알아야한다.
최치원 통일신라의 역사
통일신라 6두품 출신의 문인으로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신라삼최 중 하나로, 한국 유학과 문학에 큰 족적을 남겨 후대 고려, 조선시대까지 숭앙되었다. 삼국사기에서 <난랑비>의 서문에 유-불-도의 핵심 가르침이 이미 한국의 고유정신인 풍류(화랑도)에도 존재하는 것이라 말하였다.
경주 최씨(慶州 崔氏)의 중시조이다. 최씨의 시조는 신라 건국기의 인물 소벌도리지만, 사실상의 시조는 최치원으로 여긴다. 다른 최씨의 시조도 경주 최씨에 비롯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대한민국의 대부분 최씨의 중시조라 할 수 있다.[2]
뛰어난 천재로서 신분의 벽을 넘기 위해 해외 유학을 가 "개천에서 용난다"는 속담을 실현한 후 나라를 살리기 위해 돌아왔지만 다시 한 번 신분의 벽에 막혀 좌절한 사람의 대표격으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틱한 인생 때문인지 그를 신격화하여 주인공으로 한 《최고운전》이라는 고전소설이 있다.
최치원은 유불선의 가르침
최치원은 유불선의 가르침이 이전부터 전해오던 '풍류'라는 가르침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중국사상이 들어오기 전부터, 한국에는 집에선 효도하고 나라에는 충성하며, 억지로 가르치지 않고 행동으로 따르게 하며,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칭찬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가르침에 '세속오계' 가 있는 것으로 볼 때, '풍류'라는 가르침이 실제로 화랑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치원은 이렇게 우리의 사상과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우리 스스로 제시하고 이를 표현하였기에 그 공로가 크다.[4]
문성왕 19년(857년) 통일신라의 사량부(沙梁部)에서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견일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원성왕의 원찰 숭복사(崇福寺) 창건에 참여했다는 행적이 전한다.[5]
친형 현준
친형 현준(賢俊)이 있었으나 출가해 해인사로 갔기 때문에[6] 집안의 사실상의 장남인 최치원은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다 12살 때인 868년 당나라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당시 신라에서는 837년 한 해에만 216명이 당나라에 유학생으로 떠났을 만큼 당나라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고, 당나라 유학 경력이 있으면 신라에 돌아와서도 출세길이 보장된 엘리트 코스였기 때문이다. 떠나는 배 위에서 아버지에게 "10년 안에 과거급제 못하면 어디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도 마라. 나도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겠다" 라는 말을 듣게 된다.[7] 최치원은 "남이 백의 노력을 하는 동안 나는 천의 노력을 했다"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던 듯하다. 당초 10년 기약을 4년 단축하여 6년[8]만에 18세 나이[9]로 당나라 빈공과에 급제했다.[10]
종종 최치원이 합격한 것
종종 최치원이 합격한 것이 중국인들과 함께 경쟁하는 진사과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의 진사는 과거시험의 최종합격자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중앙관서로 올라가지, 장원급제자를 2년 후에야 현위에 임명하지는 않는다. 등과기고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이전의 경쟁상대를 발해인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최치원이 합격한 것은 외국인 대상시험으로 치러지는 빈공과가 맞다.
최치원은 빈공과에 급제한 후 2년간 관직이 나오지 않아서 허송세월을 하면서 동도(東都) 낙양에서 유람하면서 서류대필과 저술활동으로 끼니를 때웠으며 이 때 금체부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9수 1권 등의 시를 썼다. 2년만에 지금의 강소성 난징 지방인 선주 율수현의 현위[11]에 임명이 되었으나 임기를 마친 3년 뒤 다시 대기발령 상태가 된다.[12]
당나라에서 율수현의 현위로 있던 시절의 일화로 쌍녀분 전설이 전한다. 짧게 요약하면 율수현 남쪽에 쌍녀분이라는 오래된 무덤이 있었는데 옛날부터 많은 명현들이 유람하던 곳이었다. 최치원이 무덤 앞 바위에 시를 써 놓고 천천히 거니는데 쌍녀분의 두 주인 원혼이 나타났고, 그들과 시를 주고받고 술도 마시며 친해지고 세 사람이 한 이불 속에 누워 하룻밤을 보내고 두 여인은 천년의 한을 풀고 성불했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백수가 돼버린 최치원은 산에 들어가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라는 중국 내국인 대상 시험을 준비하는데, 이는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승진시험으로 조선시대 과거의 중시(重試)에 해당한다. 그러나 당시 황소의 난으로 당나라가 혼란스러워[13] 박학굉사과는 열리지 않았다. 결국 관직에 있던 시절 나오던 녹봉이 떨어져 배를 곯을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후, 양양의 이위라는 사람의 문객(門客)으로 들어가서 시험 준비를 하던 중, 황소의 난이 일어나며 당해 시험은 물론 앞으로의 시험 일정마저 불투명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결국 최치원은 2년만에 시험을 포기하고, 23세 나이인 879년에 대신 구직활동에 나섰다. 당시 절도사 중 1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회남절도사 고병[14]의 문객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 시기 최치원은 동년배인 고운을 통해서 고병에게 자신의 소개와 관직청원인 자천서를 2회에 걸쳐서 올려서 결국 고병의 문객이 되었고, 고병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라는 비교적 높은 벼슬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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