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은 천안 전씨

2022. 5. 31. 16:47역사를 알아야한다.

전봉준 한약방에 들어가다

전봉준은 천안 전씨 시조 전섭(全聶)[5] 서당이나 한약방 등을 운영한 것을 보면 조선 말기에 흔했던 몰락한 중인 또는 양반 집안으로 보인다.

전봉준의 부친은 1827년생으로 창혁(彰赫), 형호(亨鎬), 승록(承祿) 등의 이름과 함께 족보명은 기창(基昶)으로 나오고(세간에 알려진 이름은 창혁), 모친은 1821년생으로 언양(彦陽) 김씨(金氏)라고 되어 있다.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은 고부 마을에서 향교의 장의를 했다고 한다. 촌로들에 따르면 전창혁은 장의가 아니라 동리의 일을 보는 사람(지금의 이장)이었다고도 하였다. 전봉준은 이런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다른 아이들처럼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유난히 키가 작아 5척(약 152cm)에 불과했고 성인이 되어서도 녹두(綠豆)[6]라는 별명을 들었는데 가장 유명한 별명인 '녹두 장군'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전봉준공초

젊었을 때의 가정 생활은 상당히 곤궁했으며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에 보면 땅은 논밭을 다 합쳐 세 마지기(약 6백 평(0.19ha)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시 빈농층이 소유했던 평균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한 가족이 살아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면적이다[7]. 공초에 의하면 태인에서 살다가 30살 즈음 고부 마을(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소재)로 들어와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한약방을 차려 한의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풍수지리를 보거나 사람들의 길흉사에 날을 잡아주기도 했으며 편지를 대필해 주기도 했다.

동학에는 30대에 들어가 접주가 되었고 1890년대 초반에는 운현궁에 있으면서 2년 남짓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있었던 적도 있다. 이에 연이 닿아 동학농민운동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밀사를 보내어 전봉준과 밀통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8]

고부 봉기 직전 전봉준의 가장 두드러지는 행보는 1893년의 김제 금구(金溝)집회 참여이다. 금구집회는 '척왜양창의'를 외친 보은집회와 유사하게 '척양척왜'를 구호로 내세웠으나, 최시형의 교주신원운동의 연장선인 보은집회와는 맥을 달리했다. 애당초 보은이 아닌 금구에 별도로 집결했다는 뜻은, 남접 세력들이 조정과 타협적이었던 최시형의 북접과 분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손화중(孫華中) 대접주와 서장옥 접주 등을 중심으로 한 금구집회 세력은 보은집회를 동정을 살피기 위해 긍엽을 파견하기도 하였다.[9] 전봉준도 접주로서 금구집회에 참석했다가, 보은집회가 해산하자 같이 해산하였다. 전봉준의 고부 봉기는 단순히 학정으로 인해 우발적으로 터져나온 봉기가 아닌, 동학도들의 조직화와 정치 세력화라는 맥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10]

유명한 탐관오리

이 무렵 유명한 탐관오리였던 고부군수 조병갑[11]의 횡포가 극심했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한 후 부조금으로 2천 냥을 거둬오라는 요구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마을 대표로 나서 항의하다가 화가 치민 조병갑한테 곤장을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진다. 이후에도 조병갑의 횡포는 계속되어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전가했는데 만석보라는 이름의 저수지를 백성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건설하고 사용료도 백성들에게 강제로 징수하여 착취하며 지방 토호들에게도 돈을 빼앗는 등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결국 분노한 그는 이 때부터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는데 1894년 농민 1천여 명을 이끌어 민란을 일으켰으며 만석보를 헐어버리고 관아를 습격해 빼앗긴 곡식을 되찾아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12]

조선 정부에서는 부랴부랴 조병갑 등의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이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한 후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하였는데 사태를 추스르기 위하여 파견된 이용태 또한 극심한 횡포를 부렸다. 전에 왔던 새로운 군수 박원명은 할 수 있었던 일이 없어 별 도움은 안 되었어도 농민들을 달래주기라도 했지만 이용태는 전혀 아니었으며 농민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행패를 부렸다.

분노한 전봉준

이에 분노한 전봉준은 1894년 3월 각 지역의 동학 접주에게 글을 보내고 손화중, 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 교도와 농민 1만여 명을 모아서 동학 농민군을 조직하며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켜 안핵사 이용태를 도주하게 만들었다. 이 때 동학 교도 중심의 북접은 폭력에 반대하여[13] 동학 농민군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승승장구하여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세력이 확대되었고 깜짝 놀란 조선 조정과 전주 화약을 맺으면서 잠시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이 파병을 요청한 청나라군과 톈진 조약을 핑계로 다시 파병한 일본군이 이미 조선 땅에 들어온 뒤였고 이들이 청일전쟁을 벌이면서 잠시 동안 이어진 평화는 깨지고 만다.[14]

청일전쟁 도중 일본이 군대

청일전쟁 도중 일본이 군대를 보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위협하면서 갑오개혁을 시행하자 전봉준은 '척왜근왕'을 외치며 동학 농민군을 모았다. 북접도 이에 합류하면서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북진을 시작하였으나 공주 우금치에서 기관총을 비롯한 근대 무기와 월등한 조직력을 갖춘 조선 관군과 일본군에게 대패했고(우금치 전투) 몇 번 더 패전을 당한 끝에 순창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군대를 모아 재기하려고 하였으나 순창군 피로리에서 만난 옛 부하 김경천(金敬天)[15][16]의 밀고로 체포되어 도성으로 압송되었고 재판[17] 후 동학농민운동을 지도했던 같은 지도자급의 동지인 손화중[18], 최경선[19], 성두환[20], 김덕명[21]과 함께 1895년 3월 29일(음력) 사형을 선고받고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30일 새벽 2시 한양 무악재 아래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쳤다.[22][23]​ 

교과서 등에 자주 나오는 대표적인 전봉준의 사진.[24] 1895년 2월 27일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를 받고 조선의 법무아문으로 이감될 때에 찍힌 사진이다. 사진에서 가마에 타고 있는데 이유가 체포될 때 다리를 몽둥이에 세게 맞아 걷기가 힘들 정도로 다쳤기 때문이다. 후대에서는 사진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상투머리의 대명사가 되었다. 아기들의 윗올림머리나 여성들의 소위 똥머리를 전봉준 스타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로 유명한 안도현 시인은 사진을 보고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안도현 시인의 등단 작품이다.

전봉준의 봉기와 실패는 조선 백성들의 기억에 남았고 노래를 불렀는데 이 민요가 파랑새이다. 호남 지방에서는 광복 후에도 자주 불려졌다고 한다.들어보기[26]
1980년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봉준 장군 유적 정화 사업을 지시해 관련 사적지에 거창한 기념비들이 들어선걸 두고 혹자는 같은 전씨 가문의 장군이라는 부분에서 연결점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전봉준의 본관인 천안 전씨와 전두환의 본관인 완산 전씨는 뿌리는 같을지언정 갈라진지 천 년이 넘는 남남이나 마찬가지 씨족이다.
전북 현대 모터스의 서포터 걸개에도 전봉준의 그림이 가끔 나온다.

 

송씨 송두옥

전봉준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의외로 없다. 본인의 자료가 남아있는게 없고 가계에 관한 1차 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1차 재판 기록에서는 부인과 2남 2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아들들은 전부 후처 남평 이씨 이문기(李文琦)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고 딸들은 전부 1851년 8월 16일에 태어나서 1877년 4월 24일에 죽은 전처 여산 송씨 송두옥(宋斗玉)의 딸[27]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남 전용규는 후손 없이 사망, 차남 전용현은 행방불명이 되어 남계 후손이 모두 단절된 줄 알았으나 전용현이 자신의 이름을 바꾼채 족보와 호적도 은폐하여 숨어 지내면서 대를 이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계 후손으로는 장녀 전옥례는 아들 둘, 차녀 전성녀는 딸 하나를 뒀다고 알려져 있다. 전옥례는 1963년 갑오 동학 혁명제가 열리자 세상에 전봉준의 딸이라고 나타났으며 1970년 사망했다. 2004년 특별법 제정에 따라 유족이라는 사람들 4~5명이 유족 신청을 했으나 전봉준의 시신이 수습되지 않아 유전자 감식이 불가능하고 관련 증빙 자료가 없어 인정받지 못했다. 확실한 후손들이 남아 있어 유족으로 지정되고 제사도 받고 있는 다른 동학 간부들과 달리 전봉준은 후손이 불명확하여 천안 전씨 종친회에서 1954년 제사를 대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전봉준의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별도로 제사를 지내고 있기는 하다.

관군은 전봉준

관군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군 간부들을 사형시킨 뒤 시신들을 유족들에게 넘기지 않아 확인된 바 없다. 김개남의 시신은 갈기갈기 찢어져 전라북도 임실군 학암리 야산에 버려졌다고 전해지며 손화중과 최경선 등의 경우는 유해의 행방이 묘연한데 관군이 처형 후 그대로 암매장한 걸로 추정된다. 이런 까닭에 정읍시에는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 등의 무덤이 있지만 모두 시신이 없는 가묘다. 김개남의 경우 매장되었다고 알려진 전라북도 임실군 학암리 야산 일대에서 2010년과 2011년 시신을 찾기 위해 발굴 작업을 벌였지만 찾을 수 없었다. 들짐승에게 먹히거나 해서 뼈도 남을 가능성이 매우 낮다. 2016년 9월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특수법인인 동학농민혁명 기념 재단이 전라북도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에 있는 전봉준의 추정 묘역을 발굴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은 주민들 사이에 전봉준 장군의 묘라고 전해져 왔고 30여년 전 '將軍天安全公之墓'(장군천안전공지묘)라고 쓰여진 1미터 높이의 비석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28] 그러나 조사 결과 17세기의 회곽묘 구조임이 밝혀져서 전봉준의 묘는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