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5. 25. 22:27ㆍ역사를 알아야한다.
당나라 현종
8세기 초중엽 사람으로 당나라 현종의 후궁. 양귀비는 이름이 아니라 양(楊)씨 성에 귀비(貴妃)[3]라는 직함이 붙은 것이다.[4] 본명은 전하지 않으나 도사가 되었던 시절 태진(太眞)이라는 도호(道號)[5]를 사용했기에 사서에서는 본명 대신 양태진(楊太眞)이라고 칭하였고 옛 중국의 사대부들도 흔히 '양태진'이라 불렀다. 아명도 전하지는 않으나 일설에 따르면 옥환(玉環)[6] 또는 옥노(玉奴)였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대중들이 흔히 양귀비를 '양옥환'이라고도 불렀다.
양태진의 본관은 포주(蒲州) 영락(永樂)[7]으로 개원(開元) 7년(719) 용주(容州)[8]에서 출생했다. 중국에서 전하는 속설에 따르면 옥 고리(옥환玉環)를 손에 쥐고 태어나서 부모가 아명을 옥환(玉環)이라고 지었다고 하고, 은둔해 살던 선비가 어린 태진을 보고서 "이 아이가 성장하면 황후와도 같은 자리에 오리르라." 하고 예언했다는 말도 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숙부의 집에서 살다가 개원 23년(735, 17살) 현종의 제18황자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가 되었다.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개원 25년(737)에 당현종이 총애하던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현종은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아다녔으나 통 만나지 못하였는데 수왕비가 아름답더라고 진언하는 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개원 28년(740, 22살)에 황제가 온천궁(溫泉宮)에 행행(行幸)한 기회에 양태진을 만나보고는 총애하였다. 양태진은 수왕의 저택을 만나 일시적으로 도관(道觀: 도교사원)에 들어가 출가하여 태진(太眞)이란 도호를 받아 여도사(女道士)가 되었다. 이것은 현종이 자기 아들의 비, 즉 며느리를 빼앗는다는 세간의 눈총을 피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황제와 내연의 관계였다. 이때 현종의 나이는 56세였으니, 양태진과 나이차이가 세른세 살에 달했다. 게다가 당시 중국의 평균수명을 따져보면 할아버지가 묘령의 아가씨와 정분이 난 꼴이었다.
천보(天寶) 4재[9](745, 27살) 때 현종
천보(天寶) 4재[9](745, 27살) 때 현종이 정식으로 양태진을 귀비(貴妃)[10]로 책립하였다. 양태진의 전남편 수왕의 생모가 무혜비였다. 양태진 입장에서는 (황제의 총비였던) 시어머니가 죽은 뒤 며느리였던 자신이 시아버지와 맺어져 예전 시어머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간 셈이다.[11]
비록 황후는 아니었지만, 오랜 국정에 싫증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기에 궁중에서는 황후나 다름없이 대우를 받았을뿐더러, 심지어 천보 7재(748, 30살)에는 다른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괵국(虢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양귀비는 물론 자매와 친족에게까지 현종이 후대하였으므로 훗날 백거이는 이런 상황을 장한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양귀비 자매가 누린 부귀영화로 친척 오빠 양국충(楊國忠) 이하 많은 친척이 고관대작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하였다. 양귀비가 남방(南方) 특산의 여지(荔枝)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당시 양귀비의 옷을 만드는 전문인력만 700명이 넘었다고 하니 나라가 기울지 않을 리가 없다.
천보 14재(755, 37살)에 양국충
천보 14재(755, 37살)에 양국충과 반목하던 것이 원인이 되어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듬해 천보 15재(756, 38살) 안록산의 군대가 장안(長安) 가까이까지 치고 들어오자 현종은 귀비 등과 더불어 사천으로 도주하였는데, 장안의 서쪽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진현례(陳玄禮)와 병사들은 양씨 일문에게 불만이 폭발하여 간신 양국충과 양귀비를 죽이지 않으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겠다고 주장하며 멈추어 버렸다. 당현종이 아무리 명령해도 말을 듣지 않으므로 하릴없이 양국충을 처단하였으나, 양귀비에겐 죄가 없다고 막으려 하였다. 하지만 워낙 병사들의 기세가 드세어 양국충이 죽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달랠 수가 없었기에 결국 양귀비는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양귀비는 중국의 4대 미인
양귀비는 중국의 4대 미인(美人) 또는 5대 미인 중 한 명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 언급되곤 한다. 정사(正史)에선 양귀비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표현했는데, 체구가 둥글고 풍만한 느낌의 미인이란 소리다. 즉 지방이 별로 없는 슬림한 체형이 미의 기준인 현대의 미인상과는 다소 거리가 먼 타입. 양귀비 이전에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인 매비가 양귀비를 일컬어 비비(肥婢, 살찐 종년)라 욕했다는 일화도 있다.[12]
옛날 벽화나 그림을 보면 미인은 통통하거나 육덕지게 살집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왜냐하면 당시는 음식이 귀해서 살이 찔 수 있는 사람들은 대개 신분이 높았기 때문에 통통할수록 미인으로 보았다.[13] 특히 당나라는 당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주해 살던, 지금으로 치면 미국 같은 다문화 국가였기 때문에 유럽이나 중동의 영향을 받아 육덕 체형의 미인이 인기가 있었다.[14]
양귀비는 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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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는 가무(歌舞)에도 뛰어나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양귀비의 별명인 해어화(解語花)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말을 알아듣는 꽃, 얼굴만 예쁜 꽃 같은 후궁이 아니라 지적인 여자라는 의미로, 동시대의 이백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白居易)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曲)으로 하여《장한가(長恨歌)》를 노래하여 양귀비는 중국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여주인공이 되었다. 진홍(陳鴻)의《장한가전(長恨歌傳)》과 악사(樂史)의《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이후 윤색은 더욱 보태져서 후세의 희곡에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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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 자신은 정치나 권력 투쟁에는 관심이 없이 현종과 음악을 즐기며 지내는 생활에 만족한 편이었다.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오빠 양국충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안록산이 장안을 방문했을 때, 살이 쪄서 뱃살이 무릎에 닿을 정도인 그의 외모를 재미있게 여겨 홀딱 벗겨 목욕시켜 아기옷을 입혀 가마에 태우고 돌아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현종도 그걸 보고 웃으면서 아기 씻긴 값을 주었다고 한다. 훗날 안록산이 간신(양국충) 토벌을 명목으로 난을 일으키고 양귀비가 자살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생각하면... 중국에서는 이때 양귀비와 안록산이 사랑에 빠져 안록산이 양귀비와 다시 한 번 만나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내용의 희곡도 있지만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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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에 쓰이는 꽃인 양귀비는 당연히 여기서 따온 이름인데, 마치 마약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는 것처럼 양귀비에게 빠져서 나라를 피폐시킨 당 현종의 모습이 매우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잘 어울리는 작명이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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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불타 죽은 사람은 양귀비가 아닌 시녀였으며, 양귀비가 도주했다는 설이 있는데, 그 도망간 곳이 다름 아닌 일본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양귀비는 돛 없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상륙하여 땅에 쓰러졌는데, 야마구치현 주민들이 양귀비를 발견해서 거기서 더 살다가 죽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후손을 남겼다고 하지만 이것은 신빙성이 아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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