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의 탄탄대로

2022. 5. 31. 08:00역사를 알아야한다.

김옥균의 탄탄대로

안동 김씨 김병기[13]의 양자로 들어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포부가 대단했던지 달을 보고 "저 달은 비록 작으나 온 천하를 비추는구나."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개인의 영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과 알성시인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한 이후 개화 선구자인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역관 오경석, 의원 유홍기, 승려 이동인[14] 등을 만나 개화 사상을 배우게 되고 고종의 매제 박영효, 서재필과도 친구가 된다.

임오군란 이후 3차 수신사

임오군란 이후 3차 수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17만원의 차관을 받아 한성순보를 발행했다. 이후 일본을 배워 급진적인 프랑스식 개혁을 주장했다. 일본으로 직접 건너간 김옥균은 청불전쟁으로의 동향을 미리 살펴보는 일본 정부한테 300만원의 차관을 받아 주일 프랑스 공사관을 통해 용병을 교섭하려 했지만 차관 교섭 자체에 실패했다. 차관 교섭 실패 등 복합적인 원인으로 급진 개화파는 동력을 상실하고 민씨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된다. 이에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불을 내고 정적들을 제거하는 와중에 수구파로 전향한 옛 동지 민영익도 다쳐 정동 미국 공사관으로 후송된다. 김옥균은 스스로 호조참판의 자리에 올라 개혁을 공표한다.

하지만 창덕궁에 원세개의 청나라군 1,500여 명이 들이닥친다. 이를 막아야 할 일본군은 매우 소수에 불과했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지원 약속을 어겼다. 급히 몸을 피한 개화파들은 일본 국적선 '치토세마루'에 올라 일본으로 도주했고 김옥균은 개명 후 망명 생활을 한다. 이때 정변에 적극 가담한 김옥균의 형제들은 물론 가족들까지 모두 떼죽음을 당했다.[15] 양아버지 김병기도 연좌제로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고 사약을 받을 뻔했지만 김옥균을 파양해 연을 끊는 형식으로 유배형과 사약은 면했으나 감옥에 수감되어 옥사한다.[16] 안동 김씨 문중은 균 자 항렬을 전부 규 자로 바꿔야 했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이와타 슈사쿠(岩田秋作)'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며 일본인으로 지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김옥균을 가만두지 않고 죽이려 했고 일본에 2번이나 송환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역관인 지운영을 몰래 일본으로 보내 김옥균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했고 지운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추방된다.

청일 양국은 김옥균의 신변 문제로 계속 부딪혔으며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신변 보호를 이유로 오가사와라 섬, 홋카이도 옆 낙도 등에 보냈다가 풀어준다.

그런데 이 시기부터 난잡한 여성 관계와 유흥을 시작한다. 망명 직후 기거하며 신세를 지던 '야마구치 신타로' 집의 모친과 관계를 맺어 임신시켰고 온천과 여관을 오가며 홍등가에서 살다시피 했다. 오타루에서 사귄 일본 기생을 데려다 동거에 들어가 살림을 차린 뒤에 한량처럼 먹고 놀았다. 이때 동지이자 절친한 후배 박영효가 김옥균을 보고 사람이 변했다며 저런 인간을 믿었던 내가 멍청했다고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청국 공사 이경방

1894년 당시 주일 청국 공사 이경방(이홍장의 양자)의 설득에 넘어가 윤치호 등을 대동하고 청나라로 건너갔다. 한중일 세 나라가 힘을 합해 서양의 침략에 맞서자는 삼화(三和)주의를 이홍장에게 설파하자는 순진한 생각이었다. 회동 약속 하루 전인 3월 28일 상하이 동화양행 호텔에서 오후 2시에 낮잠을 자던 김옥균은 수구당 민영소의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김옥균은 프랑스 유학파이며 갑신정변 때 죽은 동지 홍영식의 친척인 홍종우를 의심하지 않고 곁에 두었었다. 암살 당시 김옥균은 호텔 방에 짐을 풀고 자치통감을 읽고 있었으며[17] 홍종우가 꺼내 쏜 권총에 3발을 맞고 절명했다고 보고됐다.[18] 김옥균의 암살 순간은 사극마다 다른데, 1982년 KBS 대하드라마 <풍운> 외 대다수 작품들에선 독서하다 총을 맞은 걸로 나왔지만 2002년 <명성황후>에선 가만히 있다가 총을 맞은 걸로 나왔다.

홍종우는 암살 직후

홍종우는 암살 직후 도주하다가 출동한 청국 경찰에 일단 체포되지만 조선과 청 정부 간에 협의로[19] 방부제 대용의 페인트를 덕지덕지 칠한 김옥균의 시신과 함께 국내 송환되었고 조정에서 포상과 함께 공직에 등용된다. 김옥균의 시신은 송환 직후 양화진 백사장에서 거열되어 찢겨진 후 목만 따로 효수돼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써갈겨진 천이 붙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의 잔혹한 처리에 대해 조선 국내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컸으며[20] 일본 내의 여론도 들끓어[21] 조선은 희망이 없고 우리가 개화시켜야 할 정당성이 있다는 식의 여론몰이에 이용됐다.김옥균의 목이 매달려있는 사진이므로 혐짤주의이긴 하지만 오래된 흑백 사진이다.[22]

나중에 김옥균의 머리는 어느 일본인이 수습해 도쿄의 한 절에 묻었다. 하쿠산역 인근에 위치한 절 뒤뜰에는 높이 3m 이상의 검은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상단이 파손된 것으로 보이는 얇고 높은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데 찾아오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무덤은 양자[23]가 머리에서 머리카락만 가지고 와서 따로 묻은 것이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서광범과 김홍집의 상소로 복권되나 아관파천 후 다시 취소됐고 1910년 6월 경술국치로 인해 순종황제가 망국 후 이왕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다시 복권돼 정1품 대방보국 숭록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됐다. 시호는 충달(忠達).[24]​ 

남궁억처럼 독립운동가

매우 영민하고 시세를 잘 파악하는 인물이었지만 일본을 과하게 신뢰했다는 점을 실패의 요인으로 평할 수 있다.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일본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나[25][26][27]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독립협회에서 친일적인 인사가 나온 점, 백성의 지지가 없는 그들만의 개혁 때문에 여러가지로 한계를 가진 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한때 본인이 원수처럼 여겼던 청나라의 이홍장을 만나 복권을 꾀하자는 말에 낚인 것도 그를 평가절하하는 요소로 꼽고 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인사들 중 이상재, 남궁억처럼 독립운동가가 된 사례로 있는 만큼 일부 인사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고 독립협회와 개화파를 무조건 친일파로 규정하는건 부당하고 독립협회와 대립한 황국협회에서도 민영기 같은 친일파가 나왔기 때문에 마냥 평가절하하긴 어렵다.

한편 당시 김옥균은 일본에서도 처치하기가 곤란해지는 인물이라 언제 조선에 넘겨질지 모르는 상태였고 그런 김옥균이 청나라를 통해서라도 살아남으려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위험 가능성이 있으니 안전이 확실한 지대로 피신을 한다는 말도 안되는 발상일 따름이다.[28] 오히려 김옥균이 일본을 떠나 청나라와 교섭을 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김옥균에게 일본은 그저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이용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생각했기에 언제든지 손잡을 대상을 바꿀 수 있다는걸 잘 보여준다. 여하튼 넓은 의미의 친일이라는 이름이 붙어도 이상할게 없지만 한국에서는 친일파=매국노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일본에게 이용당했지만 매국을 했다고 단정하기 곤란해서...[29]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정의되지는 않는다.

일본에서는 혁명가

일본에서는 혁명가적인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 것 같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김옥균을 일본에서 보호했던 자가 일본 개화의 아버지이자 현재도 일본 역사상 손꼽히는 위인에 들어가는 후쿠자와 유키치이며 김옥균의 조국을 위한 행동이 어찌되었건 결과론적으로 그의 행동은 모두 일본에 득이 되었기에 일본의 입장에서는 나쁘게 서술할 이유가 전혀 없다. 제국주의적 사상만 빼면 후쿠자와 유키치와 같은 이념을 공유하기도 했다. 일본 인터넷 등에서 김옥균 이름을 쳐보면 김옥균을 높이 쳐주는 포스팅이나 게시글 등도 종종 발견되는데 그런 곳에서 그에게 붙는 칭호는 혁명가 혹은 시대를 잘못 만난 영웅.[30] 다만 일본인들 사이에서의 고평가 중 어떤 부류는 "그가 일본을 모범으로 삼고 일본식 개화를 통해 한국을 개혁하려고 했었으며 일본의 힘을 빌려서 이를 성공하려 했던 인물이기 때문"일 수 있다. 즉,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당시 잘 나가는 일본을 따르려고 한 그를 혜안이 있는 자로서 칭송할 수도 있다는 것이며 그의 후원자는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여기서 방향을 잘못 나가면 식민 사관과도 접점이 있는만큼 일본의 김옥균에 대한 높은 평가는 부분적으로 신중하게 고찰해야 하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김옥균을 영웅시한 적도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근대화를 빠르게 이뤄버리려던 그의 뜻은 갑신정변 이후, 당시에 잠시 존재했던 개혁의 흐름이 결과적으로는 실패와 동시에 오히려 몇 보 후퇴하게 만들었다. 온갖 사건들에 이리저리 휘둘렸던 고종, 급진 개화파에게 당한 수구파, 온건 개화파가 급진적인 개혁 움직임에 더욱 경계를 했기 때문이다.

사실 김옥균과 관련한 문학화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 곳은 일본으로 1890년대부터 김옥균과 관련한 창작이 활발하였다. 이는 김옥균이 일본에 처음으로 온 정치 망명객 제1호인 점, 상하이에서 맞이한 비극적인 죽음, 일본 제국의 팽창과 아시아주의와 관련한 일본 국민들의 기대와 열망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경향과 다른 특이한 작품을 꼽자면 아키타 우자쿠가 발표한 희곡 <김옥균의 죽음(金玉均の死)>(1920년)이 있다. 이는 1920년 7월 김동환이 번역하여 『창조』지에 게재되었는데 김옥균은 영웅이라기보다는 범부로 그려지고 정치적인 허무주의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일본 신극 운동을 주도하던 오사나이 가오루의 희곡 <김옥균(金玉均)>(1926년)도 있는데 이는 김옥균의 <갑신일록>을 바탕으로 창작되었으며 김옥균을 시대에 맞서는 개혁자로 형상화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일본 정부와 근대화를 막는 전통과 관습을 비판했다.[31]
한국의 경우에는 1928년 김진구[32]의 희곡 <대무대의 붕괴>[33]가 사실상 처음으로 형상화된 작품이다. 작가의 성향상[34] 아시아주의에 동조하는 친일적인 색채가 엿보인다. 이후 1930년대에는 주로 민족 수난사의 하나로 김옥균이 다루어졌으며 대체적으로 비운의 인물로 그려진다. 카프(KAPF) 멤버였던 김기진은 <심야의 태양>(1934년 이후 <청년 김옥균>으로 이름 변경)이라는 소설을 발표하는데 이 소설에서 김옥균을 실패한 혁명가로 묘사하며 혁명은 민심을 읽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1940년대에는 주로 친일적인 작품 속에서 오족협화나 대동아공영권의 '선구자'로 자주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박영효의 친일극 <김옥균의 죽음>(1944년).

 

야스히코 요시카즈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역사만화 <왕도의 개>에서는 김옥균을 존경하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혁명 실패와 몰락의 과정에서 주인공의 처지와 거의 흡사한 것으로 묘사된다. 김옥균 본인도 비중있는 인물로 나오며 조선의 혁명가로 일부 고관들은 이제 한물 간 인물로 보고 있지만 민중들에게는 인기가 있으며 사람은 괜찮은 인물로 묘사된다. 글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일본 기생집에서 이름을 대면 공짜로 해주려 하는 묘사가 있으며 카츠 카이슈는 "인물은 인물이지만 솔직해서 일을 그르칠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박영효나 고종이 좀 없어보이게 나오고 명성황후가 대놓고 흑막처럼 나온 것과는 대조적. 해당 작에서는 지나가는 언급으로 흥선대원군 역시 뛰어나다고 언급된다.
에가와 타츠야의 <러일전쟁이야기>에서도 등장하는데 만화에 등장하는 조선 측 인물들 중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이다. 현재까지도 한국의 김옥균 무덤보다 일본의 김옥균 무덤이 정비가 잘 되어 있으며[35] '김옥균 연구 모임'이라는 일종의 팬클럽도 존재한다.[36] 일부에서는 김옥균을 조선의 사이고 다카모리로 보는 정도인데 당연한 이치로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조선총독부에서 강력하게 김옥균 미화 사업을 벌일 정도였다. 몰락한 김옥균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가 총독과 식사를 한다거나 김옥균 처의 수기가 연재되기도 했다.
망명하려는 김옥균이 조선 관헌에게 송환될 위기에 처하자 일본 선장이 나와서 총을 들이대면서 묄렌도르프 일당에게 호통쳐서 위기를 넘기는 단편도 있다.[38]
프레시안에서 박은숙 씨가 저술한 김옥균 평전 <김옥균 역사의 혁명가 시대의 이단아>를 두고 김기협 씨와 박은숙 씨가 논쟁을 벌인 바 있다.(김기협의 서평 박은숙의 반론) 격렬한 김옥균까인 김기협도 문제지만 박은숙도 지나치게 김옥균을 고평가하는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그녀는 김홍집을 지나치게 까면서 김옥균을 견줘 찬양하고 있다.
대체역사 웹툰 <왕 그리고 황제>에서는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 되어 고종의 오른팔로서 활약한다.
대체역사 웹소설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야심 넘치는 민족주의 정치가로 등장한다. 김옥균(고종, 군밤의 왕) 문서 참조.​